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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기념독립투사에게 보내는 편지

이봉길 2015.08.04 조회 1058

4월에 부치는 편지

- 윤봉길 의사께 -

                                                               이 봉 길

   햇살 따사로운 4월 어느 날,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충의사를 찾았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오른 편 솔밭 언덕을 오르니 부인 배용순 여사의 묘소가 있습니다. 묵념을 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23세 나이에 기약 없이 떠나신 임을 기다리며 고향을 지키셨고, 지금도 홀로 그 땅에 누워계신데 목련꽃만 속절없이 피었다 집니다.

   그때는 3월 초, 산천초목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대장부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 한 줄을 남기고 곧장 경의선 북행열차를 탔습니다. 젊은 아내는 집을 나서는 낭군에게 물 한 잔을 드린 것이 이생에서 마지막 이별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고향에 사랑하는 부모님과 아내와 자식을 두고 장도에 오르신 당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저한당(抵韓堂)에 당신이 기거하셨던 방에는 그때 쓰던 책상이 그대로 놓여있는데, 임은 먼 이국땅에서 불꽃같은 생을 마쳤습니다.

   “청년 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된 당신의 마음이니, 집과 가족을 떠나신 결심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상해임시정부를 찾아 김구 선생을 대면하시고 마음의 폭탄을 가슴에 안고 상해로 왔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제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폭탄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일본 히로히토 천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장에서 단상을 향해 던진 물통형 폭탄으로 일본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상해 거류 일본인민단장의 폭사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일본 간부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이어 도시락 폭탄으로 자폭하려던 순간 일본 경찰의 폭행으로 혼수상태에 빠지셨습니다. 그때 당신의 나이 25, 결코 짧지 않은 생이었습니다. 저는 직업군인으로서 복무했습니다. 대한민국 군인이면 누구나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각오는 되어있습니다만, 젊은 나이에 하나 뿐인 목숨을 의거에 투신하신 당신 앞에서는 한없이 작게 느껴집니다.

   1932429, 홍커우 공원에서의 의거는 조선의 호랑이가 아시아를 흔들었던 포효였으며, 일본 통치에 반항하는 민족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항일투쟁의 꽃이었습니다. 이 의거로 미주지역 한인교포들의 참여와 일시 주춤했던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으며, 중국인들에게도 항일투지를 고무시켰습니다. 당시 장개석 총통은 우리 4억 국민과 1백만의 병력도 감히 못하는 쾌거를 조선의 한 청년이 결행하였다.”라고 칭송하였고,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그 후 카이로회담 때,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선언문에 이를 명문화시킨 배경이 바로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올해는 해방 70주년, 상해 의거 8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은 아직도 그들이 저지른 침략과 우리민족에 대한 만행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는커녕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등 명백한 역사의 기록이 있는데도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평화통일을 염원하면서 21세기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국내외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마음의 폭탄 하나를 가슴에 품고 당당하게 나서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봄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고 있는 이곳 섬 중의 섬(島中島)’에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윤 의사께서 고향을 떠나실 때 건넜던 시냇물은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고, 강둑에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딘 쑥과 질경이가 싹을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 <계간문예> 2015년 여름호에서

 

 

저한당(抵韓堂) : 윤봉길 의사가 성장한 곳으로 1911(4)에 부모를 따라 이 집으로 이사 와서 1930(23) 망명길에 오를 때까지 생활했다. 19728월까지 의사의 유족이 살았고, 1974년에 증수되면서 저한당(한국을 어려운 데서 건져낼 집이라는 뜻)이라 명명 되었다.

홍커우((虹口) 공원 : 지금은 루신(魯迅)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공원 안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梅園)이 있음.

섬 중의 섬(島中島) : 덕숭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윤의사가 태어난 곳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며 작은 섬을 만들고 다시 합쳐져 흐른다. 윤봉길 의사는 한반도 중에서 일본군은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는 뜻으로 섬 중의 섬(島中島)’이라고 하였다.

 

  • 배기준 2015/08/05 06:00:00
    凡人은 오직 고개 숙일 따름입니다.
    꽃다운 25세,그 얼은 강물되어 역사에 영원 할 것입니다.
    ※ 미조리함 일본대표 항복 서명자 외무대신 시게미스 마모루가
    지팽이 짚고 쩔뚝거리며 등장합니다. 바로 홍구공원 윤봉길 거사에 부상당한 한사람이지요,
  • 이봉길 2015/08/16 23:14:54
    사람은 언제 어디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바친 선조님들 덕분에
    지금 자유대한민국에서 평안하게 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시간입니다. 저와 이름이 같은 윤의사를
    생각하면 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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