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국형 전투기 몰고 영공 지킬 그날을 고대하며
관리자 2021.05.11 조회 77732
중앙일보 2021.05.11 00:32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규희 공군사관학교 72기 생도 국제관계학과 2학년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덕분에 우리 말을 손쉽게 글자로 적을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조선 사회에는 혁명적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문자 향유 계층이 늘어나 조선 백성이라면 누구나 지식을 축적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한자나 이두가 아닌 한글로 생각하고 소통하며 지식을 전달한다. 한글은 그 자체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한글이 창제되고 약 575년이 흐른 지난달 9일 우리는 한국형 전투기(KF-21) 시제기 출고식을 했다.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최신예 국산 전투기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한 지 만 20년만에 이룬 쾌거다.
KF-21 개발 과정은 고난과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눈부신 성장 덕분에 “우리도 개발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얻기까지 여섯 번의 불가 판정을 받아야 했다. 지금도 “서양의 검증된 전투기가 있는데 굳이 비싼 돈을 들여 만들 필요가 있는가”, “주변국들과 해외 방산업체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등의 비관론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러한 비관론은 다시 한번 한글 창제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중화를 사모하는데 부끄럽다. 문자 생활은 이두로도 불편하지 않다. 언문은 학문을 약화시키는 한낱 기예에 지나지 않는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이런 반대 상소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한글의 시작은 화려하지도 환영받지도 못했다.
굳이 왜 국산 전투기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것은 훈민정음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와도 맥이 통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다. 4대 강국으로 둘러싸인 상태로 북한과 대치 중인 우리나라의 생존과 주권 수호를 위해서는 우리만의 치명적인 전투력이 있어야 한다. 말과 글을 잃어버린 나라가 역사 속에서 존속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살아남은 국가는 없다.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플랫폼이다. KF-21이라는 독자적인 플랫폼은 타국의 간섭 없이 무기를 시험하고 개발하고 개량할 수 있게 해준다. 현대전은 먼 하늘에서부터 온다. 항공우주력은 도발의 징후를 가장 먼저 탐지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항공우주 우세를 보장한다. 전쟁이 시작되는 하늘에서 확실히 보증해야 승리의 필수 요소를 확보하는 셈이다.
필자는 KF-21의 첫발을 내디딘 2001년에 태어났다. KF-21이 칠전팔기(七顚八起) 정신으로 수많은 고난 속에 성장해왔듯이 이제 갓 20세인 필자도 삶이라는 고된 행군 과정에서 단련돼 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공을 우리가 만든 전투기로 지키겠다 선언한 공군사관학교에서 당당한 사관생도가 됐다. 창공을 가르며 치솟는 은빛 날개에 대한 경외심으로 군문에 들어섰다. 군인의 길을 가고자 마음먹은 순간부터 닥쳐온 수많은 갈등과 고난을 이겨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제복 오른쪽 어깨에 부착된 태극기는 KF-21과 함께 할 미래의 무게와 기대를 감당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그 시작의 다짐을 잊지 않고자 험난한 단련의 과정을 인내할 것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빛날 하나의 별, 우리 공군의 정체성이 될 KF-21, 그리고 저 하늘에서 별처럼 빛날 나. 우리 함께 활주로를 내달려 창공으로 날아오를 날을 학수고대하며 공군사관학교 성무대(星武台)에서 오늘도 값진 하루를 보낸다.
김규희 공군사관학교 72기 생도·국제관계학과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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