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세월이여! (설악산 여행기)
박창용
2023.11.02
조회 63626
아 세월이여! (설악산 여행기)
잡을 수 없는 세월을 찾으러 여행을 떠났다. 어쩌다 떠나는 여행은 흘러간 세월의 자취를 뒤돌아보고 회상하면서, 그 세월을 다시 돌아볼 수가 있어서 정신세계를 넓혀주는데 여유로움 같은 걸 느낄 수가 있다. 인간의 한평생이 정말 잠깐인데 때로는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잡을 수 없는 세월을 탓하며 괴로움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할까? 그래도 세월은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여서, 여행이란 즐거움이 있고 웃음이 있으며 낮선 곳을 다니며 친숙해져가는 설렘이 있다.
동해의 푸른 파도는 예전과 다름없이 힘차게 출렁이는데 가을 바다는 번잡함이 없어 한적했다. 지난여름 북적대던 수많은 인파가 내뿜던 소음들을 말끔하게 지워버린 해변에는 한적함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를 줄 것 같다. 다만 지칠 줄 모르며 끝없이 밀려와 사정없이 부서지는 파도만은 예전의 그 모습과 똑같았다. 그 왕성한 파도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영겁을 오가며 날카롭던 바윗돌을 깎고 닦아 부드러운 조약돌을 만드는 거친 파도는 한시적인 인간과는 달리 영원한 것일까?
백사장을 걸으며 해변에 부서지는 하얀 물거품을 바라보면서,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돌아보았다. 부서지는 파도의 영원성과는 달리 뭇 생명 있는 것들이 가야하는 길이 너무 좁고 짧은 것이어서,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서, 한시적인 삶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깊은 슬픔을 보았다. 생 노병사라는 인간의 생의 한주기가 끝이 나면 어김없이 돌아가야 하는 자연의 질서를 생각했다.
한계령에서 주전골을 내려오는 골짜기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기기묘묘한 선경을 연출하고 계곡을 흐르는 옥수와 더하여 절경을 보여주고 있는데, 보이는 것이 선경인지라 어느 한곳인들 놓칠 수가 없어 정신을 놓고 감상했다. 문득 까마득히 보이는 산의 정상에 머물고 있는 한 점 흰 구름이 외로워 보였다. 남설악의 깊은 첩첩 산중에는 계곡마다 빽빽하게 들어찬 송림이 하늘을 가린 채 오늘도 오가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아직도 계곡에는 한여름의 푸르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이 산머리에서부터 내려와 절정을 이루고, 송림에서 뿜어내는 진한 솔 향이 코를 찌르는데 가끔씩 들려오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래 소리가 고요를 깨뜨리며 청아하게 들려왔다.
아담한 용소 폭포에서 떨어지는 비취색 옥수가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 구비 구비 이어지는 좁다란 계곡에는 바위까지 하얗게 물들이며 용케도 돌고 돌아도 질서를 지키며 흐르는 옥수가 보석처럼 맑고 깨끗하게 보였다. 아 우리 생전에 저 아름다운 선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순간 복잡하게 얽힌 세속의 티끌까지 옥수에 씻어 청정한 몸을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나 이내 부질없는 욕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선조들께서는 우리 산야를 금수강산이라 노래했건만 이제는 맑은 물 보기도 쉽지 않게 되었으니 계곡을 흐르는 옥수가 예사롭지가 않아서 얼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군데군데 작은 웅덩이에는 푸른색을 띈 맑은 옥수가 넘치도록 고여 있어서, 마치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들이 목을 축이고 몸을 씻은 후 방금 떠난 것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오색약수의 산행은 모처럼 걸어본 특이한 경험이어서 아쉬움을 뒤로한 체 떠나야했다.
비 내리는 산길에는 고운 낙엽들이 물들어있고, 계곡에서 맑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낙엽이 떨어진 고즈넉한 산길에는 고요가 깃들어서 이내 바람 따라 흔들리는 그윽한 풍경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널리 알려져 있는 절은 아니었지만 화암사 가는 길은 이렇듯 운치가 있었다. 산사에는 고요가 있다하여도 내 마음의 고요로 이어지지는 않으니, 그것이 속세에서 물든 번잡함 때문이라면 그냥 마음에 느끼는 것으로 족해야 할까? 어찌 고요한 산사에 와서 공연한 욕심을 내다니 어리석은 인간이 갖는 욕망이란 부질없고 끝이 없는 가보다. 어떻게 사는 게 후회 없는 한 평생의 인생인지 그걸 어느 스님께 길을 물어보아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으나 끝내 해답은 찾지 못했다.
산사에도 그리움과 외로움이 존재할까? 그리움이란 세속에 얽힌 백팔번뇌를 끊고자 온갖 수행과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정진하여 부처님께 다가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심을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일까? 아무리 자신을 갈고 닦아도 도를 구할 수 없는 한계 앞에서 때로는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마음이 되었을 때 이룰 수 없는 것의 한탄이 외로움이 되어 다가오는 것일까?
저 우아한 독경소리 끝나면 인간의 내면 깊숙이 흐르며 두개의 마음 바탕을 이루고 있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찾아와 역시 인간의 존재를 시험하려할 것만 같다. 그러나 인간이 갖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본시 같은 것이라면, 그리움과 외로움은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인간만이 갖는 때로는 부질없는 감정이리라. 공연히 고요하고 깨끗한 산사에서 세속적인 헛된 망상을 하였나보다. 그러나 어리석음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했으니,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에 한걸음 다가서는 것이라면, 미혹한 마음에도 조그마한 지혜의 빛을 느낄 수가 있다면 여행의 보람은 더할 것 같았다.
아 세월이여! 어느덧 우리들 나이가 이렇게 많이 쌓였으니 이번 여행에서 잠시 누렸던 기쁨과 아름다운 추억을 언제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그래도 머리칼은 하얗게 희여졌고 주름진 얼굴로 변했으나, 모처럼 깔깔되고 웃으면서 동심의 세계에 빠진 동기생들의 순수한 모습에서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만 늙어가고 있는 것 같아 잠시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모처럼 눈을 즐겁게 하고 일상의 삶속의 근심을 줄여서 잠시 정신적인 기쁨까지 얻었다. 잠시 산사에 머무는 동안 마음속에 존재하는 갈등과 욕심을 버리고 깨달아서 어쩌면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로 조금은 가벼워졌을 육신을 기대하며 오래도록 남을 추억을 쌓아 가슴속에 간직했다.
2023, 10, 30. 월정 박 창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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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작품은 공사 19기 임관 50주년을 기념하고 자축하기 위하여 동기생들과 설악산 가을 여행을 하면서 느낀 소감을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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