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진기 예비역 공군 중령前 팬텀기 조종사
1980년대 초반 F-4 팬텀기 조종사 시절, 동기생이 비행 훈련 중 순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내가 동기생의 부모님을 병원으로 모셔오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는 군 관련 사고가 잘 보도되지 않아 일반 국민은 사고를 잘 알 수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조종사의 부모님을 모셔 와야 하는데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새벽에 군복 차림으로 아들의 동기생이 나타나자 부모님은 매우 놀라셨다. 그 부모님은 본능적으로 아들의 사고를 아셨을까. 나는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지금 사고로 입원 중"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부모님의 충격을 덜어 드리려는 안간힘이었지만 나 역시 본능적으로 부모님이 느끼고 계실 불안감을 알 수 있었다. 서로 극도로 대화를 피해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분위기였지만 모두가 가슴으로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날 그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막혀 온다.
영결식이 끝난 다음 날 우리 전투조종사들은 전부 한곳에 모였다. 순직한 조종사들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다시 비행훈련에 몰입해야 한다는 결의를 하고 다시 전투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 푸른 하늘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전투조종사가 된 이후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영결식에서 우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이 순직 동기생의 어린 아들이었다. 까만 눈망울의 그 아이가 십수 년 뒤에 주위의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대(代)를 이어 전투조종사가 되었다. 언론에 나온 그 청년을 보고 우리는 "전투조종사의 피는 푸를 것"이라고 했다. 피가 푸르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앗아간 그 푸른 하늘로 다시 날아갈 수 없었을 것이란 뜻이었다.
그 동기생의 아들이 몇 년 전 야간 비행훈련 중 서해 하늘에 몸을 묻고 말았다. 그 어머니를 생각한다. 남편과 아들을 모두 조국의 하늘에 바쳤다. 아들은 시신(屍身)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그대로 아버지가 묻힌 국립묘지에 합장되었다.
조종사들은 동료의 순직사고 후 다시 비행이 시작될 때가 가장 힘겹다. 영결식의 여운이 남아 있는데다 동료가 산화(散華)한 하늘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전쟁이 슬픔을 이해해 줄 리 없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을 피해 줄 리도 없다. 오직 강하게 훈련된 전투조종사들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신념(信念)으로 다시 하늘로 향한다. "이제 눈물을 닦자. 그래도 비행 훈련은 계속 되어야 한다"며.
명절을 하루 앞둔 밤에 전투 초계 비행을 하면 전국의 모든 도로가 자동차의 불빛으로 환해진다. 까만 밤에 적막한 조종석에서도 그 불빛 속 자동차에 모여 있을 어느 가족과 그 가족이 만날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풍성해진다. 슬픔을 잊고 다시 비행을 할 수 있는 원동력도 우리가 그 행복들을 지킨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 오충현 대령, 어민혁 소령, 최보람 대위의 명복을 빈다. 비슷한 시기 헬기 사고로 순직한 고 박정찬 준위, 양성운 준위의 명복도 빈다. 그들 동료의 슬픔을 아는 사람으로서 순직 조종사의 동료들에게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위로를 드린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행복하다. 지켜야 할 푸른 하늘이 여전히 저기에 있다.
조선일보에서 퍼온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