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남한의 5만 간첩,공산화 베트남의 5만간첩

이치훈 2010.12.20 조회 646

 

 

 

김필재 기자

 

 

“남한 내에 고정간첩 5만 명이 암약하고 있으며 특히 권력 핵심부에도 침투해있다….

그쪽(한국) 권력 깊숙한 곳에 이쪽(북한) 사람이 있다….

우연히 김정일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았더니 그날 아침 여권 핵심기관의 회의내용과 참석자들의 발언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당시 서신)

 

 

자유베트남(남베트남)은 시종일관 반미 반전(反美·反戰) 데모를 주도했던 간첩과 시민 종교단체의 조직적인 선전선동 결과 미군의 전면 철수 후 공산화 됐다.

 

남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당시 기준 세계 4위, 병력 58만 명)에서도 북베트남(월맹)을 훨씬 앞질렀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급 인사의 자제와 돈 있는 집 청년 10만 명 이상이 병역기피 및 해외 유학을 갔거나 군 출신 장군이 운영하는 사기업에서 일했다.

 

지도층의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만능주의의 병폐가 체제 파괴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자유베트남은 민족주의자/평화주의자로 위장한

5만 명의 간첩에 의해 패망했다.

사진은 1966년 5월 수도 사이공에서 열린 반전시위 장면이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 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은 민족 간 내전으로 미국 등 외세가 내정 간섭 할 문제가 아니라면서 미국을 고립시켰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수많은 간첩을 파견, 동조자를 포섭하고 각 분야에 간첩을 침투시켜 혼란을 조성하는 등 정부가 힘을 집중시키기 못하도록 했다.

 

특히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등 가능한 모든 운동체가 총동원되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전쟁반대를 주장하며 1963년 6월 11일 분신 자살한

승려 '틱쾅둑'(Thich Quang Duc) 이후 베트남에서는

종교인들의 분신자살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1975년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개 이상의 좌익단체의 선전전에 당했던 것이다.

 

패망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5만 명의 월맹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베트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면서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부패척결운동반미반전(反美·反戰) 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 받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자유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

(당시 기준 세계 4위, 병력 58만 명)에서도

북베트남(월맹)을 훨씬 앞질렀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급 인사의 자제와 돈 있는 집 청년 10만 명 이상이

병역기피 및 해외 유학을 갔거나

장군이 운영하는 사기업에서 일했다.

 

 

베트남은 공산화 이후 지식인, 공무원, 군인, 종교인, 부유층, 그리고 자유 베트남 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은 전부 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적대(敵對)계층으로 분류됐으며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로 간주되어 승자의 보복대상이 됐다.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되었고 전국 각처에 재교육 수용소가 설치되어 적대계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고 공안경찰을 증원(增員)하여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했다.

 

특히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했다.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하여 "부모의 흘린 피와 땀, 자식이 흘린 피와 땀이 합쳐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선전하면서 무자비(無慈悲)한 노동을 강요했다.

 

논과 밭은 국유화되고 영농은 철저한 3모작을, 일반 국민은 헌금을 강요 받았으며 돈이 없는 자는 노력봉사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는 한 달에 15kg의 쌀을 배급 받아 생활해야 했고, 전쟁부채 상환비, 전비(戰費)기금을 내야 했다.

 

 

자유베트남이 패망하자 미군 헬기를 타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후 베트남 사람들은 공산 치하에서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의 국민 재교육은 "공무원(公務員)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경찰(警察) 및 정보요원은 제국주의의 도구(道具)로, 군인(軍人)은 무력으로 총을 가지고 대항했던 사람으로, 문예(文藝)인은 민족정신을 교란시킨 사람으로, 종교인(宗敎人)은 국민을 유혹하여 미신에 빠지게 하고 우매하게 만든 사람으로, 자본가(資本家)는 국민을 착취해 강압적 노동을 시켜 반혁명에 앞장을 섰으며 국민에게 피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죄를 물어 재교육을 시켰다.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됐던 땅굴의 모습.

 

 

 

 제거해 버리고 싶은 적대계층의 사람은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더라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외국(外國)의 항의를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해 냈다.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사절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으며 의료혜택은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등의 열병과 뱀 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 및 미래에 대한 포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했다. 즉결 처분된 사람들을 포함, 그 인원은 최소 30만에서 최대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 출신의 경우 하사관 및 초급장교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면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의 인원이 재교육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북한 전투기 조종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호지명

 

김정일은 “한반도 적화(赤化)통일 달성 시 1천만 명은 이민 갈 것이고, 2천만 명은 숙청될 것이며, 남은 2천만 명과 북한 2천만 명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 공산집단의 이 같은 주장을 절대 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북한은 베트남 전쟁에서 조종사,

갱도병(땅굴파기 병사) 등으로 참전해 

한국군과 미군을 공격했다.

사진은 90년대 초 인민군 유해가 북한으로 이장된 후

베트남에 남은 묘비의 모습이다.  

이들의 유해는 현재 북한군 인민군 영웅열사 묘에 안장되어 있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을 수호하는 것은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협상도 아니다. 북한 공산 집단에 맞서 우리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전쟁은 결국 ‘의지의 대결’이다.

한반도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북한은 핵무기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강성대국’ 진입시기인 2012년부터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는 2015년을 ‘남조선 혁명의 성숙기’로 보고 있다. 북한 급변사태에 앞서 북한에 의한 남한 급변사태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군사 안보전략은 반드시 비관론적 가정에 근거해야 한다. 근거 없는 낙관론을 배격해야 한다. 지금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철통 같은 총력안보태세를 다짐해야 할 때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 신차현 2010/12/21 07:06:36
    다시 한 번 되 내입니다.자유의 나무가 자라서 울창한 숲이되면 아름다운 꿈을 꾸겠습니다.나를 구속하는 모든것에서 진정코 자유롭고 싶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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