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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난리 역사를 돌아보니

변희룡 2011.06.01 조회 463

물난리 역사를 돌아보니

 금년 일본 대지진 때 일이다.116년 만에 발생한 15m 쓰나미로 인해 이와테 현에서 8천 명 이상이 사망하였으나 후다이 마을의 3천 명은 모두 무사했다. 원인은 와무라 촌장에게 있었다.촌장은 '메이지 시대의 산리꾸 대지진(1896) 때 쓰나미가 15m에 달한 적이 있었다'는 전설같은 말을 근거로 방조제 높이를 15.5m로 건설할 것을 고집하여 관철시켰다. 그 때가 1967년 이웃마을에서는 10m 방조제가 너무 높다고 큰 비난을 받던 시절이었다.

 유사한 사례가 한국에서도 있었다. 한강 정비를 끝낸 1986년, 북한이 금강산댐(임남댐, 저수량 29억 톤)을 건설하자 이 댐이 수공에 사용될 것을 대비하여, 전두환 정부는 '평화의 댐'을 착공하였다. 완공 이듬해인 1990년 9월 11일 한강이 범람했다. 미리 정비해 둔 덕분에 하류인 일산 쪽의 둑만 터져 서울이 침수되는 대재앙을 면했다. 이때 평화의 댐도 큰 역할을 했다. 이 댐이 없었다면 북한이 금강산댐의 수문을 한 개만 열어도 서울은 침수되었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이런 긍정적인 측면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1993년에는 감사원까지 나서서 `평화의 댐은 수공 위협을 급조하여 과장한 것'이라고 공식 비판했다. 최근에는 단지 4대강 사업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한강을 정비한 공로도 혹독하게 매도되고 있다. 이점 와무라 촌장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다시 2002년, 김대중 정부는 직전 정부의 감사 결과와 악성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 댐을 125m까지 증축하기로 결단했다. 이유는 `금강산댐이 사고로 붕괴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증축 후 2009년 9월 6일 일요일 새벽 2시, 북한이 임진강 상류의 황강댐 수문을 갑자기 열어 남한에서 사망자가 생겼다. 북한은 고의가 아니라고 우겼다지만, 주말 새벽 2시란 점과, 당시의 강수량, 그리고 이어서 금년에 발생한 천안함 사건, 연평도 피격사건 등을 미루어 볼 때, 고의였을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만약 평화의 댐이 증축되어 있지 않아서 금강산댐에서 이런 사고가 위장되었다면 피해지는 바로 서울이었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취임 초기에 동강에 댐 건설(저수량 3억 톤)을 계획한 적도 있었다. `수자원 비축량을 늘이고,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환경단체들의 극심한 반대를 받았다. 반대에 휘둘려 포기한 결과로, 2001년과 2008년에 닥친 가뭄에서 정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를 해야 했다. 가뭄이 2009년까지 이어지자 각 지자체들은 다음 가뭄에 대비한다면서 하천과 저수지 준설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였다.

전국에 난립한 이 준설작업들을 이명박 정부가 통합하여 4대강 사업이 되었다. 역시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경쟁적으로 준설작업을 추진하던 지자체마저 4대강 사업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업도 평화의 댐처럼 준공 후에도 논란에 휘말릴 것이다. 여론이 비등할 빌미는 가뭄 문제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향후 5년 이내에 가뭄은 반드시 재발할 것인데,이 사업으로 추가 확보되는 13억 톤의 물은 주로 하천수여서 장기가뭄에는 큰 역할을 못한다. 따라서 피해가 나면 또 4대강 사업 때문이라 할 것이다. 가뭄 대비용으로 진행되던 하천 준설작업을 홍수 대비용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 해결책은 간단명료하다. 와무라 촌장이 116년 전에 발생한 재해를 기억하였듯 정부가 110년 전인 1901년의 대가뭄을 기억하면 된다. 그 해 서울의 연강수량이 374㎜(최근의 평균은 1400㎜)였고, 전후하여 29년이나 가뭄이 지속되다가 종료되는 해(1910년)에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이 사실은 전설이 아니고, 재현될 수도 있는 역사이다. 그래서 동강댐 포기는 아쉽고, 중국의 산샤댐(400억 톤)은 부럽다. 2011.0507 부산일보-변희룡-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ubSectionId=1010100000&newsId=2011050600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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