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와 윤봉길 의사
변희룡 2011.07.17 조회 333
안보 논단에서 '역사와의 대화' 에 답글을 올렸는데 사진이 잘 안나오 이쪽으로 옮겨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침 상해 루신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 있기에 올립니다.
1. 번 사진 : 동행에 윤의사의 족손이 계셔서 매향당 앞에서 기념촬영.
중국인이 한국어로 녹음하여 설명하는 윤의사의 행적,
여러말이 필요 없이 간단명료하더라.
그러면서 확실하게 전달하더라.
동행한 여러 교수님들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느라 정신이 없더라.
아무리 위대한 생애였다 하지만
남의 말을 듣고 감동하는 것은
교수 체면에 좀 부끄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2. 윤의사 기념비. 조선족 가이드 오명화 씨가 설명하고 있다, 얼굴에만 살이 포동포동

3. 중국인들이 지어 윤의사께 바쳤다는 루신 공원, 상해 임시 정부가 더럽고 지저분하게 보관된데 비해,
이 공원은 중국전체에서 가장 단정하게 정비된 곳이란 인상을 받았다.

4. 상해는 중국의 중심, 그 발달상이 서울에 못지 않다. 특히 황포강 주변의 야경은
별천지에 온 느낌을 준다.-변희룡 -21기.


여기가 상해 임시정부 정문 앞입니다. 빈민의 빨래걸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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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의 대화
역사란 현재와의 대화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그들 국가를 송두리째 상실한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은 그런 의미를 강하게 우리를 깨우쳐 주는 사자성어이다. 대한제국이 신흥 일본국의 식민통치 하에 소멸되고 중국, 동북삼성 지역에 만주제국(滿洲帝國) 이라고 하는 속국(屬國)을 건립한 이후 그들은 급기야 여세를 몰아 중국 대륙을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대륙에 이미 진출한 많은 기득권을 가진 여러 서구열강들에게 그리고 취약할때로 위약해 지친 중국 국민당 정부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고 더불어 그들 천황의 생일을 경축하는 행사를 상해 홍구공원(현 루신공원)에서 거행했다. 그 날이 1932년 4월29일이다. 윤봉길 열사께서 항일(抗日) 대한독립을 절규하며 살신헌국(殺身獻國) 대역사를 거행하신 날이다. 「민족지혼 경천동지(民族之魂 驚天動地)」라 대한국인(大韓國人)의 한 청년이 혼심(魂心)을 담아 투척한 수제폭탄으로 경축 단상의 "시라가와(白川) 대장"과 중국 거류민 단장 "가와나베(川邊)가“ 즉사하고 일본공사와 현역장성 2명을 포함하여 많은 일본인 고위 참석자들에게 중상해를 입혔다. 문자 그대로 그 행사장은 순식간에 "경천동지"가 된 것이다. 6억 인구인 큰 나라 중국이 일본 군국주의 군대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시점에 일어난 대사건으로 총통 장개석 장군은 이 거사의 주인공 윤봉길 열사는 우리 중국 청년 100만 명이 합해도 달성치 못한 엄청난 일을 했다는 정중한 경의를 표함과 아울러, 윤봉길 열사는 진정한 평화 애호자로서 동양전체민족의 안녕질서와 근린친교의 참뜻을 현출한 위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또한 중국 본토에 동아리를 갖었던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본거사 이후에 장개석 정부로부터 후한 예우를 받게 되었음을 지난 역사가 증면한다. 1949년 10월 중국대륙의 통치자는 바뀌고 모택동 시대로 대체 되었다. 일 년 후 김일성 공산도당의 남침전쟁에 중국은 김일성 군대와 더불어 불법 남침군으로 우리나라와 UN 군에게 대치했다.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2일간의 전투를 정지하고 정전서명의 타방(他方)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군을 포함하여 22개국 군을 대표한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대장」을 우리측으로, 북조선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과 중국군지원군 사령「팽덕희」를 타방으로 한 6.25전쟁 정전 협정(문)이 성립되었지만, 장장 58년의 변화없는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필자가 상해 홍구공원을 방문한것이 1990년 9월 이었다. 공원 남서쪽 한켠에 자그마한 노점하나가 있는데 빈약한 수제 기념품과 잡동사니 물건들과 같이 20여점의 훈모필서가 있음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 「민족지혼 경천동지(民族之魂 驚天動地)」주문(主文)에 이어 「윤봉길 열사 항거찬....상해인....상」으로 끝맺음 한 힘과 마음이 혼일된 훌륭한 2점을 호가 20배를 지불하고 ‘여행중인 한국인 김동호 상해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라고 기록서명을 남기고 왔다. 이 글2쪽을 그 후 내 사무실(옮길때 마다)에 계장하여놓고 있다. 당연히 방문객들과 반듯이 대화의 한축을 갖인다. 그 후 중국은 1992년에 우리나라와 국교를 정상화 했다. 지난 20년간 한중우호협회의 창설의 일원으로 계속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의 친교도 많아졌고 현재도 친구로서 교분을 깊이 하고 있는 인사들도 꽤 있다.
윤봉길 열사는 1932년 12월 15일 일본본토 “오오사카” 외곽에서 총살에 의해 귀중한 일생을 마감하셨다. 향년 24세셨다. 루신공원에 마련된 윤열사의 “숭덕당-매헌”에는 시기(時季)를 가리지 않고 많은 우리 대한인과 중국인 그리고 지식층 일본인들의 참배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안중근 열사와 더불어 중국 땅에 활짝 피우신 근화(槿花)이심을 명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중국. 우리나라와 수교한지 근 20년 만에 교역 제2위 국가가 되었고, 이 나라의 경제력은 일본과 EU를 제치고 세계 제 2위에 들어선 큰 나라가 되었다(G-2). 우리의 주적(主敵)인 북한 김일성 정권(헌법상 김일성만의 나라)과 밀착하고 그들의 후견을 할 수 밖에 없는 나라. 작년(2010년)에 북한 김정일과 그 군대가 연이어서 서해에서 군사도발을 크게 저질렀음에도,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북한 김정일 정권의 부당행위에 대한 제재에 동조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대북한 절대 영향력 행사국가!!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교류친소를 갖고 있어야 하나?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없고 여원한 우의도 없다는 소박한 감성으로만 너머 갈 수 없지 않은가?
중국 상해에 모셔진 윤봉길 열사를 매개로 하는 역사와의 대화에서 역사의 부침과 시공을 초월하는 길을 찾아야 함이 현재 우리들이 선도해야할 과제라 다짐해보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5월 15일
전쟁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