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2에 재조명해본 5.16혁명의 역사적의의(1부)
이치훈 2012.07.25 조회 111
2012년에 재조명해본 5.16혁명의
역사적의의(1부)
0.5.16 쿠데타는 ‘위로부터의 근대화혁명’이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10년통치를 독재라는 이유로 민주화를 부르짓는 세력들(야당과 학생들)이 주동이 된 ‘4,19’는 ‘혁명’으로 정착이 되어 있고,
대한민국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망후 신군부의 계엄하에서의 새로운 정치질서 확립을 위한 조치들에 항거하여, 총포로 무장한 시민군과 진압군간의 시가전으로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던 5,18 광주 사건은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법적으로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조국근대화를 이룩한 5,16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올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5, 16 혁명은, 물론 ‘군사 구데타’적 방법 이었지만, 그후 혁명적 대변혁 및 성취에 대하여, 역사적, 법적으로 통일된 올바른 명칭과 해석이 나와야 한다.
5,16을 오로지 헌정질서를 파괴한 ‘군사 쿠데타’라고 폄하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첫째로, 소위 ‘민주투사’라고 자처하는 자들 즉, 데모를 하다가 혹은 반정부 활동 중 체포되어 어떤 형태이건 ‘고통’을 당한 자들이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 ‘반감’과 악감정을 기준으로 악평한다.
둘째 부류는, 북한 김일성과 남한의 종북.좌익 세력이다. 그들은 4,19 이후 거의 무정부 상태와 같은 혼란 속에서, 적화통일의 절호의 기회를 가졌지만 5.16군사혁명으로 놓쳐버린 속쓰린 역사이기 때문이다.
5,16의 “혁명공약’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는다’고 선포했으며, 적색분자들을 척결했기 때문에, 그 세력들은 지금까지도 박정희와 5,16 혁명을 합헌정부를 총칼로 무너뜨린 불법 ‘구데타’라고 선전선동하며 폄훼하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도 ‘리서치 앤 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대통령이 누군가?’에 대하여 국민 75.6%가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남한의 친북.종북좌익 및 그 동조세력을 25%정도로 추정한 것과 박정희의 국가발전 업적을 최고로 인정한 75.6%와는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0.5,16을 왜 단순한 군사구데타가 아닌, ‘조국근대화 혁명’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해야하는가?
5,16혁명은 단순히 국가 권력을 찬탈하여, 정권교체만을 이룬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에, 낡고 병든 사회, 경제, 문화, 사상, 국민의식, 국민 생활 전반에 걸처 근본적으로 ‘대변혁’을 성공적으로 이룩했기 때문이다.
윤보선 당시 대통령은 “올것이 왔다”고 했는데, 그 의미는 불가피한 상황임을 인정한 것이며, 당시 60%이상의 애국국민들이 환영을 표명한 혁명이고, 그후에도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속에 국민혁명으로 확대되어, 전분야에 걸처 국가발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즉,
* 5.16혁명은 경제부흥, 후진국 농경사회를 ‘경제 선진국 형 산업사회 구조 ’형태로 바꾸고,
*철강, 자동차, 조선, 전기, 전자, 정보통신, 석유화학, 등 각 분야의
개척, 도전 및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 항만, 철도, 고속도로, 지하철, 공업단지조성 등 산업 기반, 인프라
구축,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의 획기적 변화,
*그 밖에 치산 치수, 과학기술 진흥, 자주국방 강화 등을 통해 조국
근대화를 이루었으며,
*오늘날 세계 선진산업국가로 발전하는데 기반을 구축하였다.
0.5.16혁명은 한국역사 및 세계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혁명으로 기록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비교해 보면서 상식적으로 공감과 이해
를 할수밖에 없다.
제정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학생들의 <데모>, 군중들의 <반란>, 군인
들의 <쿠데타>로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다가 (소위 ‘밑으로부터의
혁명’) 어느 순간 <짜르 체제>가 붕괴되고.
정치권력이 귀족세력으로부터 러시아 볼셰비키로 이동한 사건이었고 이
전과정을 모두 뭉뚱그려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러시아의 정치권력이 이동한 후(좁은 의미의
혁명)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대대적인 변혁이 일어났지만
(넓은 의미의 혁명), 이로 인해 러시아 인민들 대다수의 삶의 질이 획기적으
로 향상되지 못했다.
1990년대에 소련이 붕괴되고 개혁개방 되면서 까발려진 공산주의 종주국으
로 80여년간 군림하던 소련 크레물린의 실체는 국부를 깡그리 독점한 <신흥 공산당
귀족들의 독재>와 주인이라던 대다수 노동자.농민들의 삶은 철의장막속에서
허황된 共産.平等사회라는 선전선동과는 달리 최악의 공산지옥이 되어 붕괴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
중국공산당 혁명(1949), 쿠바혁명(1959), 베트남혁명(1975)들도 마찬가지...
반면에 5.16은... 박정희의 군부세력에 의해 <군사 쿠데타>로 시작, <실패한
민주정부> 장면정권을 청산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지만.(소위 ‘위로부터의
혁명’) 아프리카보다도 못 살던 거지나라 한국에서 <강대국형 고도산업국가
의 건설>을 목표로 한 강력한 <산업혁명>을 추진한 결과
,
한국사 5000년을 둘러 봐도... 세계사 5000년을 둘러 봐도
...
50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불과 30년도 안되어.
..
그토록 비약적으로 향상된 예를 찾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
당연히 <대성공한 근대화 혁명>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혁명지도자 박정희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새마을운동>까지
대성공시켜..한국은 농업과 공업 모두에서 국민과 국가의 균형발전을 이룩한
보기 드문 <근대화 혁명 대성공 사례>이다.
특히, 국가 성장정책 방향에 대해, 당시 다수의 의견들이.. 돈도 기술도 없으
니 스위스.네델란드 형의 <작지만 빛나는 나라>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
박정희의 독재적인?? 결단에 의해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같은
<강대국형 고도산업국가>로 갈 것을 결정 하였다.
일본 육사를 나온 그는 <일본이 했다면 한국도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자신
감의 발현 이었다
당시, 반공 동지국가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대만은 <작지만 빛나는 나라>
를 향해 “중소기업 중심”의 성장정책으로 일본의 하청(下請) 공업국가로
편입(編入)되어 갔지만...
박정희가 이끄는 대한민국은 <강대국형 고도산업국가>를 향해 대기업 중심
의 성장정책으로..철강, 기계, 조선, 자동차, 전자, 반도체, 중화학 공업 등.
전 산업분야에서 일본의 대기업들과 <목숨을 건 격렬한 경쟁>을 극복해야
하는 힘겨운 길을 택했다.
0.박정희가 이끌었던 1970년대의 대한민국은 <남의 돈을 꿔서 부자가
된 세계역사상 최초의 나라>로 기록된다.
박정희는 남들의 예상을 깨고 포항제철이 대성공을 거두자 ..대망(大望)의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 <수많은 달러>를 꿔다가 중화학공업 단지조성과 수많은 공장을 세웠다.
* 수많은 공장들을 최대한 가동시켜, 최대한 상품을 생산하고,
<최대한 수출> 했다.
* 수출로 <벌어온 달러>로 <꿔온 수많은 달러>를 갚아 나갔다.
<조국근대화의 목표아래 모든 국가 성장정책을 주도하는 핵심> 박정희의
지도력이 중단되거나, 기조가 흔들리면 안된다고 판단, 1972년 <10월유신>을
선포 한다. 그러나 야당 및 반정부 세력들에게 엄청난 저항과 장기독재라는
오명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
그로인해 박정희 중화학공업화는 <한강의 기적>이란 칭송을 받으며 세계적
인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1973년(제1차),79년(제2차) 오일쇼크...전국적인 저항운동에 이어지는 <10.26
시해사건>으로 인한 박정희의 급서(急逝)로 제3공화국은 불운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국정은 안개속을 헤메이며 혼돈에 빠져들고, 국민들은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과정
에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계엄선포하의 <12.12 사태>발생후 혜성처럼 등장한
신군부와 새 지도자 전두환은 <10.26 사건의 정치위기>와 <2차 오일쇼크의 경제
위기>를 급속히 수습하면서 사회.경제를 안정시키며 , 제 5공화국을 출법시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성장궤도를 달릴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