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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창설의 주역 서암 김정렬 장군

관리자 2009.10.09 조회 919

 

 

 

 

[ 국방일보 독자마당 ]

공군창설의 주역 서암 김정렬 장군
 


“현재 북한 공군의 전투력으로 보아 만약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즉각적인 북한공군의 공습으로 서울 시내는 불바다가 될 것이며, 한강다리는 끊어지고 국민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북한군의 6·25 남침이 일어나기 14개월 전에 이토록 끔찍한 상황을 정말 섬뜩할 정도로 정확히 예언하신 분이 계셨다.

1949년 4월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첫 신입생을 모집하던 육군항공사관학교 교장 김정렬 대령이 공군의 독립과 전투력 강화의 필요성을 널리 홍보할 목적으로 출간해 정부 요로에 배포한 ‘항공(航空)의 경종(警鐘)’이란 등사본 책자에서 ‘한국 공군력 부재시의 가상 시나리오’로 예측했던 내용이 바로 눈앞의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자신들의 잉여 전투기를 아르헨티나에는 단돈 1달러에 제공하면서도, 주한 미군이 사용하던 경폭격기 30대는 한국의 거듭된 인도 요구에도 불구하고 도끼로 부숴 고철로 팔아 버릴 정도로 한국의 전투력 향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때였다.

L-4·L-5 연락기와 AT-6 연습기 도합 30여 대만이 있었을 뿐인 우리나라에 우려했던 북한군의 남침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고, 과거 태평양전쟁 시의 전투기 파일럿이었던 김정렬 장군은 “전투기 한 대 없는 공군참모총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공군 전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김정렬 장군의 공군 창군이라는 거대한 신화창조 프로젝트는 1946년 5월 사이공에서 동남아 지역 징병징용자 1100명을 인솔해 귀국한 직후부터 시작됐다. 신화창조의 첫 단계는 육군 내에 항공부대를 먼저 창설하는 것으로 정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공군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그리고 일단 인적자원의 확보를 위해 남한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항공 관계 인사들의 명단을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하는 대사업부터 착수했다.

이에 한국 출신의 첫 비행사로 알려진 안창남 선생과 똑같은 시기에 중국 유일의 자일로스코프 비행기를 조종했던 중국 국방대학 출신 비행사 최용덕 장군을 비롯한 중국 항공대의 여러 인사들은 물론, 당시 국내외에서 항공 관계에 종사한 경험자들의 인적사항을 확보함으로써 예상보다 빠르게 인력 동원이 결성됐다.

즉 총 9개 영역에서 조종사·정비사·통신사는 물론이고 공항관리 업무까지 총망라해 무려 500여 명이 집결함으로써 육군항공대 창설과 공군 독립이 잇달아 이뤄질 수 있었다. 1948년 최용덕·이영무·장덕창·박범집·김정렬·이근석·김영환 등의 일곱 분이 모두 부대장급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육군항공대 창설을 위한 일념에 백의종군 정신으로 조선경비대 보병학교 특별반에 이등병 입교를 기꺼이 수락한 과정도 우리 공군 역사에 길이 남을 커다란 기록 중의 하나였다.

이 훈련을 수료하고 이어 미국 군제에 의한 장교 훈련까지 마친 직후 육군 미군정 통위부 직할로 항공기지사령부가 창설되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 관련 부대가 됐다. 김정렬 소위 형제가 돈암동 집에서 만든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최소 70명 정도가 이 항공기지사령부 창설에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들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경축행사에서 육군·해군과 나란히 항공기지사령부의 깃발을 들고 분열식에 참가하게 됐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듯이 바로 이날 또 하나의 기적적인 행운이 찾아온다. 새 정부의 국방장관으로 내정된 이범석 장군이 개인적으로 김정렬 대위를 집으로 불러서 첫 국방차관의 인선에 대해 논의를 하자고 한 것이다. 이때 중국 공군 출신인 최용덕 장군을 첫 국방차관으로 결정하고 차관직 수락에 대한 설득 책임을 김정렬 대위가 맡게 됐다.

이범석 장관과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최용덕 장군은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김정렬 대위는 이종찬 장군과 협의해 최용덕 장군을 설득하는 데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이어진 끈질긴 토론 끝에 기어코 차관직 수락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덕분에 우리나라 초대 국방차관에 공군 출신이 오르게 됐다.

이와 같은 노력과 함께 항공군 건설의 사명감을 갖고 국방부 수뇌와 정부요인들에게 공군력의 중요성을 설득함으로써 국군조직법 부칙에 “장차 필요에 따라서는 육군항공대를 공군으로 조직한다”라는 문구가 들어 갈 수 있게 됐고, 공군 독립의 기틀이 마련됐다.

1949년 1월 육군항공사관학교 개설, 6월 제1기 생도 입교식을 치르면서 새로운 인재 양성에 대한 일련의 작업을 마친 김정렬 대령은 같은 해 10월 1일 드디어 공군의 독립 창군을 이뤄냈고, 동시에 초대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돼 전투장비의 현대화와 그에 따른 예산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이와 같은 공군력 강화 및 발전을 위한 김정렬 장군의 노력은 이미 미 공군으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있었던 바 한국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 미 공군은 한국 공군에 전투기 F-51 10대를 인도, 항공작전에 참가토록 해 다대한 전과를 수립했다.

이어 김정렬 장군은 한국 공군의 전력증강을 미 공군에 요구해 전쟁기간 중 한국 공군은 전투기 F-51로 장비한 전투비행단을 편성, 유엔 공군과 더불어 한국전쟁 기간 중 공중작전에 출격함으로써 혁혁한 전과를 수립해 공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항공대 창설에서부터 공군 독립에 이르기까지, 또한 6·25전쟁 중 그리고 그 후 전투에 있어서도 한국 공군 강화를 위해 어느 한 순간도 김정렬 장군의 열정이 멈춘 적이 없었고, 어느 한 부분도 장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해군의 영웅이었다면, 서암 김정렬 장군은 누가 봐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우리 공군의 영웅이었다.

서암 김정렬 장군의 빛나는 업적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것이지만, 수년 전에 김정렬 장군의 동상 건립 추진계획이 진행될 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얼마 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그만 중단돼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질중국과 일본에서 항공 분야에 종사했던 모든 인적자원을 총망라해 미국과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도 빈틈없이 공군 창군을 성공시켰던 서암 김정렬 장군을 한때 일본군이었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날 갑자기 그 찬란한 빛을 현저하게 퇴색시켜 버린 것이다.

공군 창군 60주년과 공군사관학교 개교 60주년을 맞이해 서암 김정렬 장군의 업적 재조명과 동상 건립사업은 더 늦기 전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공군사관학교 1기생을 필두로 총동창회 회원과 현역 및 예비역 모두가 이 계획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바다.아울러 이 계획을 시작으로 공군 창군 및 발전에 관련된 많은 영웅담을 발굴해 범국민적으로 공군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사업도 함께 추진해 나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라 생각한다.

<최규순 (예) 준장 공군사관학교 1기생회 회장>

 

200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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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9
2009.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