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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3]

고종무 2013.05.11 조회 139

*관악산 행군

 

자 그럼 관악산 행군부터 시작 해볼까요......

관악산은 민코도 잘 알다시피 서울대학교 캠퍼스 뒷 편에 있는 산으로 연주암이 있는 산이다.

사관학교(지금의 보라매 공원)에서 봉천동 쪽으로 약6-7 키로 미터, 십 오리 정도의 거리에 있는데, 매년3-4월이되면 년 중 행사로 각 편대별로 경쟁을 해서 등수를 정하는데 작업복에 수통, 화이바를 써고 대열을 지어 출발하여 관악산 입구 까지는 아주 빠른 속도의 구보로 달려간 후 산이 가팔라지면 그때부터는 1-2열로 줄을 지어 산을 오르는데 올라갈수록 경사가 아주 심해지고 연주암 바로 직전의 정상 쪽에는 50도가 넘는 경사가 버티고 서서 많은 생도들을 지쳐서 낙오하도록 만들고 있단다.

오르다 지치는 사람은 준비해간 도복 끈으로 묶어서 덜 지친 사람들이 끌고 또 뒤에서 밀고하면서 올라간다.

한사람의 낙오자에 대한 감점이 아주 높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끌고 가야만 하고 최종 점수는 마지막 도착한 생도의 시간에 감점을 포함해서 각 편대의 종합 서열이 매겨지는데 1등을 못하면 그날은 돌아와서 더 혹독한 기압을 선배들에게 받게 된단다.

정말 필사적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올라간단다. 개중에는 하도 힘들고 지친 나머지 정신이 잠간 나가서 생도 전대장(왕 현식대령님) 보고 별명을 부르며

“왕방울 너는 왜? 안 뛰고 거기 서만 있냐..??? 어서 뛰지 못해!!!”하면서 욕하는 생도도 생기고

올라가다가 너무 힘들어 살짝 맛이 가는 바람에 “선배님 저 도랑에서 가재 잡고 갑시다.”라고

소리, 소리 지르며 엉뚱한 곳에 있는 개울(도랑)로 미친 듯이 달려가 도랑을 후벼 파면서 가재를 잡는 시늉을 하는 정말 웃기는 후배도 있었단다.

[ㅅㅇㅇ 동기생과 한해 후배인 ㄱㅇㅇ인데 누군지는 비밀로 하자]

정말 쓴 웃음이 절로 나는 코메디랄까...????

여러 번의 고비를 넘기고 죽을힘을 다해 산 정상을 넘으면 내리막이 있고 그 옆으로 연주암이 자리 잡고 있지 아주 포근한 어머니 품처럼.....

또 내리막 아래 편편한 곳에는 여러 생도가 쓰러져들 있고.....

정말 가관이란다.

그런대 웃기는 것은 낙오한 생도 대부분이 등치가 크고 특히 럭비선수들이 많았다.

사전준비 구보에 시합연습 하느라고 많이 빠져서 운동선수지만 지구력이 모자란다고들 하던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매운 것만은 확실한 것 같더구나......!!!!!!!!!!!!!

실제 관악산 행군을... (아니 구보가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하는 날도 힘들지만 더욱 힘 드는 것은 이를 위한 사전 훈련이란다.

편대별 시합이다 보니 각 편대별로 자체 훈련을 엄청나게들 하게 마련이란다.

한 달여 전부터 매일 집총구보나 구보를 연병장에서 한 시간 이상 하는데 속도가 장난이 아니란다.

몇 명씩 낙오하고....얻어맞고....낙오자가 많은 학년이나 내무반은 특별 훈련이나 기압이 추가 메뉴로 기다리고 있단다.

그런대 아빠가 3 학년 때 이 행군을 하다가 4학년 편대장생도(16기 장ㅇㅇ)와 아빠와 같은 편대 2학년(18기 송 강형)이 순직하는 끔직한 일이 생겼다.

산을 오르는 도중에 낙오해서 나무 그늘 아래 눕혀 두고 올라갔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 햇볕에 노출되고 병원에 옮기는 시간이 늦어서

일사병+심한 탈진으로 응급수술을 하였으나 끝내 사망 하였다.

이 바람에 그 다음해 훈련은 안하게 되였고.....더 안타까운 것은 그 편대장생도는 아주 모범 생도로 공부도 아주 잘하는 선두 그룹이었는데

배탈이 나서 며칠을 굶고도 편대를 무리해서 인솔하다가 참변을 당했단다.

정신력은 정말로 대단했지만 몸이 따라 가지 못하는데 책임감 때문에 너무 무리를 하다가.....모두들 너무나 애통해 하였단다.

그렇게 꽃다운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다니......인명은 재천이라 하지만 너무도 비통한 일이 생겼단다.

 

*남한산성 행군

 

다음은 남한산성 행군을 소개하기로 할께.....

매년 6.25동란을 잊지 않기 위해 6월 말경에 대방동 학교에서부터 남한산성까지

완전무장을(베낭, 수통, 탄띠, 화이바, 철모, M1소총)하고 행군을 하는데 날씨가 엄청 더울 때니....??????????

푹푹 찌는 염천에 태양은 사정없이 내려 쪼이고, 발바닥은 부풀어 오르고, 일사병을 방지한다고 소금 알을 몇 개씩 먹어가며 걷고 또 걷고.....

가는 도중에 급수차가 있어서 물을 마시되 너무 많이 마셔도 지쳐서 걷지를 못한단다.

그러니까 갈증을 가실만큼만 아주 절제해서 마셔야 하지....아주 절제해서 ....

그리고 수통에 채운 물도 그 다음부터는 아끼고 아껴가며 마셔야 한단다.

산성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의 물 공급은 없으니까....!!!!!!

그늘아래 편안이 앉아서 부채질하고 있어도 더운 여름에 정말 힘든 행군이지만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 이것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전쟁은 비참한 거란다.

특히 아녀자에게.....

산성에 도착하면 땀을 간단히 씻고 주먹밥을 먹는대 보리주먹밥도 꿀맛이란다.

“기자감식”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이 달다는 뜻이지....

남들은 산성에 구경하거나 놀러 오는데 우리는 훈련으로 왔으니 감정이 서로 많이 다르겠지... 놀러온 사람들과는......

그러나 늦은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모두들 지쳐서 윗도리를 벗어 제치고 나무 그늘 아래로 삼삼오오 흩어져서

너무나 맛있게 단잠을 한 시간쯤 즐길 수 있는 기쁨도 있단다.

“고진감래”어려운 일 다음에 즐거움이 온다는 옛 말씀을 진정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지.....

학교로 돌아 올 때는 트럭에 양쪽으로 앉아서 먼짓길을 대열을 지어 한 시간 넘어 달려서 눈썹들이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

그러나 갈 때와 올 때는 하늘과 땅의 차이란다.

덜커덕 거리는 트럭의 딱딱한 나무 벤치도 Deluxe한 리무진의 푹신한 좌석에 비교 할 바가 아니란다.

아빠 생각에 좋고 나쁨의 기준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비교이지 절대적인 잣대는 존재하기 어려우니까....

행복과 불행도 그래서 마음에 달렸다고 하는 것이겠지 ....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보다는 내가 가난하지만 그 반대로 면 내가 부자지 않겠니....????

행복과 불행은 꼭 돈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도 아니지만.... 항상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많은데 라고 생각하면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란다.

“지족자 부”만족 할 줄 아는 사람이 부자라는 뜻이란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 할 줄 모르면 항상 마음의 가난뱅이로 살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돈 몇 푼 안 가져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진짜 부자인 것을.....

민코야! 얘기가 한참 삼천포행 버스를 탔구나.....

 

*김포구보

 

이제는 김포 구보에 대해 얘기해 보기로 하자꾸나....

매년 5월 아카시아 꽃이 한창 향기를 발산하는 때에 맞추어 대방동 학교에서 김포공항 입구까지 왕복 구보를 하는데 거리가 몇 십 키로 되는 만만치 않은 거리란다.

그리고 이 훈련도 사전에 얼마나 예비훈련을 많이 하는지 모른다.

적어도 3-4주 전부터 매일 저녁 30분 내지 한 시간씩 구보를 하는데 비가와도 실시하니 끝나고 뒷치닥 거리가 더 많지 않겠니...?????

반바지 체련 복에 운동화 신고 거의 4시간여를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단다.

정말 지루하고 따분한 구보라 할까....????!!!!! 그 다음날은 모두들 발목이 부어올라 걸음 거리가 불편한 생도들이 많이 생기는데 아스팔트 위를 뛰어서 그렇단다.

흙길을 달리면 쿳션이 있어 그렇지 않을 텐데.......절룩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가관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그래서 모두들 아카시아 향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낭만적인 아카시아 꽃과 그 향기로운 내음이 고된 훈련의 나쁜 후유증 때문에 본질이 왜곡되어 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학과 및 내무생활

 

그러면 이제부터는 학과공부랑 내무반 생활에 대해 얘기하자꾸나.

2008.3.29(토)맑음

공사에서는 매학기(전체8학기)말 학년별로 학과성적이 90점 이상이면 학과우등,

  • 변희룡 2013/05/18 06:24:55
    이런 일이 있었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기억을 송두리채 망각의 창고 속에 가두고 살아왔군요. 이젠 아무런 미움도 원망도 없이 반추해 볼 필요가 생긴 기억들입니다. 과연 필요한 훈련이었는가? 개선할 방안은 없는가? 육체 훈련이 고된 것은 비판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신을 이끌어 주는 강의가 없었다는 사실. 즉, 성무대에는 스승이 없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부족하나마 스승의 몫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성무대에서는 그런 노력을 할 분위기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명정수 선배님, 생도들 하나하나에게 라디오 조립에 성공시켜주신 노고, 4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기억합니다. 당시 우리끼리 수근 거렸지요. "봐라. 저런 선배도 있다. " 인문과학, 아니 정신과학적 측면에서 생도들의 심성을 달래주는 스승이 계셨어야 하는데...임관후 얼마 쯤 지난 다음, 정신 교육원이 있었지요. 수고들 하셨지만 너무 젊은 교관님들, 인생을 느끼고 자아를 일깨워 주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 교육원 지금도 있는지요. 혹시 아직도 교장 인척, 지방대 석사출신 교관이 교수자리 꿰차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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