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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4]

고종무 2013.05.19 조회 191

* 학과 및 내무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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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부터는 학과공부랑 내무반 생활에 대해 얘기하자꾸나.

 

2008.3.29(토)맑음

 

공사에서는 매학기(전체8학기)말 학년별로 학과성적이 90점 이상이면 학과우등,

내무점수가 90점 이상이면 내무우등이라 하고 둘 다 해당되면 종합우등이라고 명칭을

부르고 상장과 우등흉장을 왼쪽가슴에 달아주는데 연병장에서 교장(소장, 지금은 중장)님이

직접 수여하고 그 이후 생도들의 열병분열이 있는 아주 성대한 시상식이란다.

가슴에 우등 흉장을 달면 대단한 영광이고 프라이드가 대단 했단다.

시내 나가면 사람들이 너무 멋있다고들 하고 특히 여대생들에게 인기가 괜찮았단다.

학과는 매일 6-8시간인대 체육이나 군사훈련이 없는 날은 꼬박 8시간 수업이란다.

그리고 저녁에 2시간 자습이 있고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아침에 한 시간(조등),

밤에 자습 이후 한 시간(연등)더 공부할 수 있도록 규정으로 되어 있단다.

불안한 마음에 욕심이 앞서서 연등, 조등하고 수업 시간에 졸거나 자는 생도들이 많았다.

비효율적인 공부 방법이지....

그리고 아빠 기생은(75명 입교) 4년 동안 성적순으로 4교반 까지 나누어서 누가 몇 등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고

1교반이면 상당히 목에(?) 힘도 주는 생도도 있었지.....

그리고 내무생활은 매일 침구정돈을 입에 물을 머금었다가 푸욱하고 불어서 각이 서도록 하고 캐비냇 속에 옷들도 가지런히..

티셔스, 팬티는 정사각형으로 접어서 설합에 정리, 정돈하고 수통, 총기, 대검은 항상 반짝, 반짝 빛이 나야 한단다.

정리정돈이 신통찮으면 선배들이 특히 군기생도가 순찰해서 벌점카드를 끊는대 이것이 일정 수준을 오버하면

주말에 외출도 못나가고 예복차려 입고 벌칙보행을 하게 되어 있다.

아빠와 한 내무반인 이 규대(용산고 대령 예편)동기는 어찌나 내무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아빠가 보아도 감탄을 할 정도였다.

침구는 정말로 자는 침대가 아니라 전시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견본 같았다.

어쩌면 담요를 그렇게 직각으로 만들 수 있는지....????

또 목재 캐비넷을 열면 어떻게? 그렇게도 옷을 가지런히, 예쁘게 걸어 두고

설합을 보면 네모 반듯 반듯하게 티셔츠와 팬티를 자로 잰듯 규격에 맟추어서

금방 다림질한 것처럼 주름살 하나 없이 정리한 것이 한폭의 그림이요,예술? 이었다.

그리고 총기는 물론 특히 대검과 수통은 항상 반짝 반짝 광택이 나고....

그래서 아빠가 농담으로 "규대야! 너 매일 그렇게 열심히 딱다가 대금 다 딿아 버리고 수통에 빵꾸 나겠다"고.....

남들은 외출, 외박 나가고 면회도 오는데 벌점 오버하여 총기매고 벌칙 보행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아라.

창피하기도 하지만 기분이 어떻겠니...????!!!!

아빠는 단체 기압 외에는 개인 호출이나 벌칙 같은 것을 받아 본적이 없지만 딴 생도들이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많이 아팠단다.

이왕 할 것 미리 미리 좀 신경 써서 잘하면 될 것을.....

앞에서도 얘기한바 있지만 이왕 할 수밖에 없는 일은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주인의식을 갖고 긍정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신 바람나게 하는 것이 아빠의 철학(?)이랄까 소신이었다.

그래야 마음도 편할뿐더러 결과도 좋으니까.......!!!!!!!!!!!!!

 

***미국 견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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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2(수)맑음

 

1967.12월 3학년 2학기 때 아빠랑 장 호근(은아 아빠),2학년은 이 영준, 윤 봉수 생도 이렇게 넷이서

4주간 미국 견학을 할 수 있는 영광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엄격한 선발을 거쳐서....[타임머신을 타고 몇 십 년이 지난 후 윤 생도만 대령으로 예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모두 소장으로 예편하였단다.]

모두들 아주 부러워하였다. 1967년경에 외국 다녀 온 사람 특히 군인들은 아주 드물었을 때란다.

15기(2년 선배기수)때부터 미국견학이 시작되었으니 생도 중에는 몇 명 없었지...

15기,16기 선배 각 2명이[김 대욱(대구 사범고 총장역임),양 승묵, 조 창조, 전 창성 (남어지 3분은 대령 예편)]

다녀왔을 뿐이고 우리가 두 번째 팀인 셈이다.

양식도 그때는 먹어보기가 쉽지 않은 때였으니 사전에 공부도 좀하였지....

샐러드, 스프가 무엇인지? 어떻게 먹는지...??

포크와 나이프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식사가 끝나면 어떻게 놓는지....??등등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교육도 받고.....

김포공항에서 미군용기 C-141을 타고 콜로라도 주의 주도인 덴버를 향해 출발하였다.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인대 미군 수송기를 여객기로 개조한 비행기를 타게 되었지...

우리 넷은 CODE 7(대령)대우를 받아 VIP석에 탑승하였고 본국으로 휴가, 출장, 귀국하는

미군 장병들로 좌석이 만원이었다.

지금은 보잉747같은 점보기와 수송기도 C-5같은 더 큰 비행기도 있지만 67년 그 당시에는

C-141이 가장 큰 수송기였고 여객기로는 보잉707이 있을 때였다.

기내에서 기내식을 먹는대 맞은편에 앉은 흑인 병사가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어서 의아해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일회용 토마토 켓찹을 딸 줄을 몰라서 우리를 보고 따라하려고 한 모양인대

우리가 따지를 않고 있으니(사실은 우리도 처음 보는 것이고 자신이 없었거든...) 혼자 따다가

(줄친 부분을 찢지 않고 그냥 힘으로 꽉 눌린 모양) 앞에 병사의 얼굴과 옷에 켓찹을 분사하는 통에 웃기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 때만 해도 미군 병사들 중에는 글을 몰라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사람이 제법 있었을 때였으니까.....

정말 글을 못 읽어서 따는 요령을 몰랐는지 아니면 그냥 실수? 인지, 어쩐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바탕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 40년이 지난 오늘도 잊혀 지지 않는구나....

열 몇 시간을 날아서 덴버에 도착하니 기내방송에서 "WELCOME TO U.S.A.... KOREAN CADETS OF THE AIR FORCE ACADEMY......."라는

생각지 않았던 환영방송과 함께 대령 급 대우로 우리가 가장 먼저 내리고 다른 장병들은 우리가 내릴 때 까지 기다리라는

내용의 방송이 우리를 놀라고 기쁘게 해 주었단다.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예우에 신경을 써주는 미국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에 감사하면서 미국의 첫 목적지인 덴버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감격과 기대에 부푼 가슴을 안고......

말로만 듣던 세계 최강의 미합중국 본토에 첫발을, 기풍당당하고 늠름하게 내 딛였 단다.

 

2008.4.11(금)맑음

 

우리가 처음 도착한 덴버는 해발6000피트나 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그래서 MILE CITY 란 닉 내임이 붙었다고.....

처음 얼마 동안은 가슴이 답답하고 계속 하품이 나오고 잠만 자고 싶다고 그곳 교민들이 일러주었는데 사실 그와 같은 증상이 약간은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는 모두들 한창 힘이 펄펄 나는 젊을 때라 교민들이 놀랄 정도로 비교적 잘 지날 수 있었단다.

그때는 우리 교민도 별로 없었고 북한이 우리 보다 더 잘 살 때여서 도서관에서 한국자료를 찾으면 거의 북한자료이고

한국 대사관하면 북한 대사관에 대려다 준다고 교육을 단단히 받았단다.

그리고 교민들도 한국 사람이라고 밝히기를 꺼려해서 주로 일본 사람행세를 많이 하곤 하던 정말 한국이 못살고 창피하던 시절이었다.

실제 거기서 만난 여대생이 한국사람 같아서 은아 아빠가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못 알아 듣는척해서

은아 아빠가 짓 굳게도 욕을 하니까 화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처음에는 얄밉고 괘씸하게도 생각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마나 푸대접을 받고 얕잡아 보았으면 자기 나라를 감추겠느냐...???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고

그 여대생이 이해가 가고 불쌍히 여겨지더구나....

나라 없는 설음에서 이제는 못살고 힘없는 푸대접받는 불쌍한 나라이니....

열심히 해서 힘 있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였다.

외국에 나가면 더욱 애국자가 된다더니.... 그 말을 실제로 가슴 깊이 느낄 수가 있었다.

GREAT KOREA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위대한 한국을 만드는데 내가 반드시 크게 기여하여야겠다고.....

 

2008.4.14(월)맑음

 

덴버에서 첫날 저녁은 한국인 교포 가정에 초대를 받았다.

남편은 한국에 근무한 적이 있는 미 육군 하사관이고.....

국제결혼을 해서 미국에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일대에는 한국 사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데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웠다고 하면서 아주 환대해 주었다.

한국을 떠난 지 불과 몇 십 시간 밖에 안 지났는데 그 집에서 먹는 김치 맛이 정말 별미중의 별미였단다. 하기야 몇 끼를 니끼 한 양식만 먹었으니.....

그리고 후배 중 한사람은 거의 양식을 못하는 촌놈이라 아주 걸신들린 사람처럼 맛있게 먹고는 배를 가늠하기 힘들어 했고...

어디서나 핏줄은 잘 통하나 보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이 생겼겠지만.......

이역만리에서 만난 동포.... 한 핏줄 .....정말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정겨움이 가슴에 스며들고....밤늦게 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의 꽃을 피웠다.

그 교포 자랑도 진지하게 들어가며....

그때 미국에서 유행하는 것이 칼라 TV와 머스 탱(야생마)이라는 승용차였는데 그 교포가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어서 은근히 자랑을 하였고

그 얘기를 듣는 우리도 마음이 흐뭇하였단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부자 집이라야 조그마한 냉장고와 흑백 탤레비죤이 있었고 아주 부유층의 극소수만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었을 뿐

나머지 대다수 국민들은 냉장고, 흑백TV는 커녕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소위“보리 고개”가 우리를 무척 괴롭히던 시절이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0년 초반에 우리나라도“마이카(MY CAR)”시대를 열겠다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모두들 그 말씀을 잘 믿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어렵고 획기적인 약속이었는데 위대한 대통령이 어김없이 그 약속을 지켜주셨다.)

그 당시 미국에서도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집이 그리 많지 않아서 이를 가진 것이 아주 자랑거리였단다.

그리고 또 유명한 하나는 나중에 LACK LAND에서 보고 알았지만 TOPLESS SHOW(윗도리만 벗은 쇼)였고.....

(지금은 전 나체 쇼가 어딜 가나 성행하지만 그때는 토프리스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이렇게 미국에서 잊을 수 없는 덴버의 첫날을 맞았다.

1967년 미국의 유행과 인기가 칼라TV, 머스탱 자동차, 토프리스 쇼 이 세 가지란 것을 알고

또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크고, 넓고, 강하고, 잘사는 미국이란 나라를 무척이나 부러워하면서.......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강하고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빌면서.................

그리고 그 일에 나도 큰 몫을 담당 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미국에서의 첫날을 정말 뜻 깊게 보냈다.

 

*미 공군사관학교 콜로라도스프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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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23(수)비

 

미 공사에 도착 하자마자 놀란 것은 학교 캠퍼스에 바둑판처럼 보이는 테니스장이 수도 없이 많고 또 주차장마다 만원을 이룬 자동차들이였다.

그 자동차들이 대부분 생도들 소유라는 것이 더욱 우리를 부럽게 하였고....

더구나 주차장이 협소하여 1학년은 차를 소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할 말을 잊었다.

또 그 당시 미 국회에서도 너무 예산이 많이 들었다고 논란이 있었던 교회가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웠는데

알미늄과 색유리로 만들어진 우아하면서도 호화로운 건물로 무려 2억 달라가 들었다고 했다.

그 당시 2억불이면 정말 대단한 액수였단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불과 백 여 불(?) 수준이 될까 말까 할 때였으니까....

생도 내무반과 학과장, 도서관, 식당, 체육관들도 우리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여

속으로만 너무너무 부러워 할뿐 내색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가장 부러웠던 것은 자습시간은 있되 자율적으로 하고 심지어는 저녁자습시간에 여 자 친구랑 학교 캠프스 내에서 데이트를 하는 광경을 보았을 때였다.

자습시간에, 그것도 학교 내에서 여자 친구랑 데이트라니....

우리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였단다. 그리고 식당에서 식사 메뉴는 우리가 생각 못 할 성찬이었다.

거기다가 커피와 차까지 마실 수 있고....앞에서도 잠간 얘기했지만 1학년 둘리들은 식사시간에도 선배들이 시키는대로 식탁위에 올라가

고래고래 고함도 지르고 노래도 불러대는 것이 우리네 메추리 1학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저녁에는 눈길을 30-40분 달려서 교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미국생도들이 스테이크와 커피가 너무 맛있다고 하면서

학교 식사를 불평하는 것을 보고 주어진 자기 환경에 100%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더구나....

우리생도들이 매일 그렇게 먹으면 한참동안은 불평이 없을텐데...... 식사 후에 시골 까페에서

창밖으로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을 바라보며 마시는 생맥주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별미중의 별미었다.

이렇게 콜로라도 스프링, 미 공사에서의 낭만적인 첫 밤을 맞는 것이 꿈만 같았고

함께 못 온 동기생이랑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더구나.......!!!!!!

2008.4.26(토)흐림

미공사의 내무반에서 학과장으로 가는 길 가운데 “BRING ME THE MEN"이란 글귀가 아치형으로 걸려 있는 것이 유난히도 눈에 띄었는데

인재를 훌륭히 키워 배출 하겠다는 뜻이리라 생각 되었다.

미 공사에서 한 내무반 미국생도와 짧은 영어지만 여러 가지 많은 얘기를 나누며 4박5일을 보내고 미국 내 중요한 공군기지를 중심으로

매일 비행기 몇 시간씩 타고 내려서 견학하고 하루 밤 자고 다시 떠나는 빡빡한 일정을 보냈다.

상세한 일정은 아빠 미국 여행 앨범에 있는데 오래되어 지금은 몇 군데에서의 기억만 나는구나....

피닉스에서의 선인장과 야자수가 인상이 깊었고 노스롭 회사에서 F-5항공기 생산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전투기를 만들 수 있겠나?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LACK LAND에서 한 선배님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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랙크 랜드에서는 4기 선배님이신 한 영규중령님이 집에서 손수 담그신 김치와 된장찌게를 너무 맛있게 먹던 생각이 나고

밤에는 톺리스(TOPLESS) 쇼하는 클럽에 가서 맥주 사 주시던 생각이 가장 생생하게 나는구나....

그분은 그때 한국연락장교로 그곳에 파견중이셨는데 김치도 우리가 온다고 목욕탕에 다 직접 배추를 숨을 죽여서 담그셨다는데 그 맛이 정말 최고였었다.

여럿 중에 특별히 나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사람의 인연이 정말 묘한 것이 나중에 그분이 대구비행장 작전부장(대령)하실 때

단장이신 2기 진 치범 장군님과 작전사령부에 있는 동기생에게 각별히 부탁 하셔서

아빠를 광주16대대 비행 교관이 끝난 후 대구11비 151대대(1974.12)로 불러주셔서 팬텀을 타게 되었단다.

그리고 대위들은 감히 탈수 없는 광복장 훈장도 타게 해주시고.....

대전 고등 나오신 한밭 분인데 너무 일방적인 사랑만 받았단다.

아빠는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데...

나중에 소장으로 예편하시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아빠가 신촌리 35전대 비행 전대장 할 때(1992.9) 골프 치러 오셔서

골프 클럽에서 함께 오신 분들께 식사와 맥주 대접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날 너무너무 기뻐하시며 오래전의 흘러간 나와의 사연들을 말씀 하신다고 무척이나 신이 나셨는데...

나중에 다시 정식으로 잘 모시리라 생각했는데 그럴 기회도 없이 몇 해 전 간암으로 돌아 가셔서 빈소를 찾아뵙고 감사의 마음과 후회의 회한을.....

그리고 마지막 이 세상에서의 고별인사를 드려야했다.

아빠가 이때 절실히 느낀 것이 하고 싶고 또 해야 할일은 나중에 더 잘하겠다고 미루지 말고 조금 못하더라도

그때그때 때를 놓치지 말고 행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가슴을 저미는 후회의 아픔에 괴로워하지 않도록.....

민코야! 너도 이 아빠 말씀을 귀담아 들어 두었으면 좋겠다.

알았지..???멋진 아들아.....!!!!!!!!!!!!

 

2008.4.28(월)맑음

 

한 영규 선배님 얘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선배님이 돌아가시기 6개월쯤 전에 간암 선고를 받고 앞으로 6개월 정도 밖에 이 세상에 계실수가 없다는 친구 의사의 얘기를 듣고

입원하면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물어보시니까 그 의사 친구 얘기가 달라질게 하나도 없다고 해서

그 선배님은 입원하지 않고 진통제만 많이 챙기셔서 사모님이랑 몇 달 해외 및 국내 여행을 다니셨고 사모님께는 돌아가시기 두 달쯤 전에

진통제가 아니면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 없으실 때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남들처럼 하루라도 더 살겠다고 바둥 거리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드리며 환자가 아닌 정상인으로서

사모님과 생의 마지막 아까운 시한부 삶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숨기며 보내시다가 의사의 말대로 사망선고 받으시고

6개 월 정도 값지고 보람되게 사시고 돌아 가셨다고.....

죽음 앞에 초연하려고 애쓰신 한 선배님의 용기와 인내에 존경을 드리며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보살핌에 감사드리고 명복을 빌었다.

지금 이 순간 지나간 40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 오르는구나....

40년의 시공을 초월해서 생생하게.......

너무나도 생생하고 또렷하게.........

지금이라도 금방 “고 장군! 톺리스 보며 시원한 맥주 한잔 할까??”하시며 웃으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 같구나.......!!!!!!!!!

선배님!

부디 천주님, 하느님, 부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옵소서...

민코야! 선배님 얘기로 너무 한참 딴 곳을 다녀왔구나....그렇지?????

하지만 그만큼 그분은 아빠에게 정말 소중하고 진심으로 존경하는 선배님이셨다.

미국에서 4주간 견학한 소감은 한마디로 4계절을 언제나 맛볼 수(알라스카는 겨울, 택사스는 여름...) 있는

넓고 크고 강한,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

쏘련과 자웅을 결하고 있지만 총체적인 능력은 훨씬 뛰어나는 나라로 1,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최강의 나라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의 야마모도 사령관이 미국 유학을 했는데 2차 대전 발발 전에 미국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군부의 분위기가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혼자서 어쩔 수 없었다고....

감탄과 부러움을 한 가슴 가득히 안고 크리스마스 직전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돌이켜 보면 아빠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좋은 경험이고 추억이 되는 첫 미국 나들이였다.


  • 변희룡 2013/05/20 03:32:30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한수 배웁니다. 한영규 선배님, 한번 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정말 용기있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 부처님 제가 임종을 맞을 때도 마음이 약해지고 추해지지 않게 정신적 건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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