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자랑스런 선조님들.

고종무 2013.09.21 조회 271

Subject: 우리나라 왕조가 오래 지속된 이유
 

 

  

 

앞으로 3년 후부터는 대학 입학 시험에 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채택하기로 확정했지만, 지금은

한국사 국정교과서 문제로 한창 시끄럽다

.

 

역사를 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일제 식민지사관의 영향으로 이렇게 배웠다.

"조선은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그러면 청소년들은 "아, 우리 조선은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된다. 이만큼 국사를 보는 학자의 견해는 청소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1300년대의 역사 구도를 놓고 보면 전 세계에서 500년 이상 지속된 왕조는 하나도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간, 오스만투르크가 600년간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니고, 에스파냐 왕국이 500년간 지속되었지만 에스파냐 왕국 역시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간 지속된 것은 오직 조선 뿐이고 중국은 수 많은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지만 모두 수명이 300년 내외였다.

우리나라 국사를 살펴 보면 통일신라가 1,000년, 고구려가 700년, 백제가 700년, 고려가 500년

지속되었는데 이와같이 국가를 오래 지탱하게 해준 것은 기록 문화의 덕택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났다. 동학란 등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즘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일찌기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며 왕한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편지를 쓰려면 한문을 쓸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으나 그래도 불만있는 사람들은

나타났다.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지방 사람들은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 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라고 반발했다. 그래서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칠 격(擊)에 꽹과리 쟁(錚).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그러면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이것을 격쟁(擊錚)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는 형식적인 제도가 아니였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에

재임한 것은 24년인데 이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이나 된다. 이것을

제위 연수로 나누어 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바빴겠는가. 이래서 정조는 보령 40에 붕어했는 지도 모른다.

 

영조는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다.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은 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녹녹한 백성들이 아니였다. 그러려면 최소한도 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면 기록의 문화이다.

 

이집트에는 피라밋과 스핑크스가 있다. 중국에는 만리장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해외관광을

하면서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한다.

‘이집트 사람이나 중국 사람들은 참 복도 많다. 좋은 선조를 만나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

달러를 다 끌어 모으는구나’

반면에 석굴암은 정교하지만 스케일이 너무 작아 세계 관광 자원 차원에서는 눈에 띄지도

않는다. 대신 무엇을 남겨주었느냐 하면 기록을 남겨주었다.

 

사관은 왕의 하루 일과를 빠트리지 않고 다 적었다.

 

경국 대전에 따르면 왕은 공식 근무 중 사관없이는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심지어 인조는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어떤 날은 대신들에게 ‘내일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는 도망을 가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사관이 임금을

찾았다.  어디 계시냐고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다.

 

인조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라고 묻자 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어디나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인조는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다. 그랬더니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의 벼슬이다. 오늘날 공무원 제도에 비교해 보면 사무관 정도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었다. 이걸 500년에 걸쳐 적는데,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쓰고 그 날 저녁에 정서를 했다. 이걸 사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왕이 붕어하면 한 달 이내에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한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으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라고 확인을 한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한다. 4부를 출판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로 나중에는 금속

활자본을 만들었다.

 

왜 활판 인쇄를 했느냐 하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를 빼먹을 수 있고 글자 하나를 잘못 쓸 수도

있으며 하나 더 쓸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후손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가 없다. 이래서 실록을 활자본으로 만들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하니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6,400만자인데, 이는 1초에 1자씩 하루를 4시간으로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다.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들 수 있다.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느냐에 대한 한 예를 들어 본다.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이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은 참았다.

 

몇 년이 지났다. 또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 하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 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 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희 정승이 나섰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 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세종은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가 왜 사약을 받고 죽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무지막지한 왕권을 발동하여 성조실록을

보았고, 이로써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결국 그도 왕위에서 쫒겨났다.

 

또 하나의 위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이다.

승정원은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이다. 승정원은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다.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다. 이 승정원일기는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현재 288년 분량이 남아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이다. 요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난다고 한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다.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이다. 왕들의 일기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다. 이 일성록도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다.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 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등을 전부 조목조목 나누어 썼다.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는 전세계 어느 나라도 없다.

 

조선시대 법률 제도를 보면,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다. 그러나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

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사또 같이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오늘 날

고등법원격인 관찰사로 갔다. 옛날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다. 재판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 썼다. 조선의 기록 정신이 그랬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이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다. 오늘 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는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다. 왕이 무엇을 신문했느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이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졌다. 이렇게 해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은 이집트 또는 에스파냐라고 한다. 에스파냐 즉 스페인에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다. 옥스퍼드, 캠브리지, 하버드대학은 1600년대 세워진 대학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립대학격인 국학(國學)이라는 것을 세웠다.  

그것을 세워놓고 철학과를 만들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쳤다.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라고 쓰여 있다.

명산과(明算科)로 밝을 明, 셈할 算, 과정 . 계산을 밝히는 과이다. 요즘 말로 하면 수학과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된다.

 

전 세계에서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는 없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되었다. 산관들은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를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계산했다.

고려 때는 992년(성종 11)에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을 창건했고, 1289년 성균관(成均館)

으로 개칭하였다. 이것이 조선으로 이어졌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

자짜리를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를 1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몇 권 있느냐 하면 33만권 있다. 따라서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하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전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한동안 교육 정책이 한자

공부를 소홀히 했으니 이 후유증이 오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소회, 두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나라는 이와같이 통치자의 말 한 마디까지 기록해 두었는데, 이 전통이 근래에 와서

억망진창이 되어 국가 안보에 관한 통치자와 상대방 수장과의 대화 기록조차 행방불명이 된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아예 만들지 않았거나 폐기 처분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떻든 두가지 모두 국가 기강이

형편없이 땅에 떨어진 수준 이하의 행정 조직이며 국정을 희화화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두번째는 일본에 나라를 뺏기면서 실록의 기록은 대가 끊어져, 해방이 되어 건국이 되었어도 최고

통치자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정확한 사료가 없어 근대사를 보는 눈이 보수

세력과 좌파 세력과의 견해가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흔히 무슨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후일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정답이 아니다. 후일 역사가는 자기 잣대로 그리고 자기 눈높이로 역사를 기술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영원히 미궁에 빠진다. 더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은 억지를 쓰는 집단이 거칠은 행동으로 역사를 왜곡하려고 한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젊잖고 침묵하는 보수파는 메인 스트림이 아니고 목소리 크고 저돌적인 좌파가 한국사의 주류가

되려고 한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국민의 힘으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 변희룡 2013/09/22 04:42:32
    참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몇가지 ... 태종 이방원이 태조 실록을 보고싶어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정면으로 부딪혀 못 보게 한 사람은 변계량 선생입니다. 맘에 안드는 자는 다 죽인 이방원도 변계량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세종도 실록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변계량이 있는 한 말도 꺼내지 못한다고 푸념한 기록이 실록에 그대로 있습니다. 과연 변계량이 죽고 나서, 황희와 맹사성에게 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황희 맹사성이 실록을 지켜 주었습니다. 황희, 맹사성도 죽고 나서, 정인지가 다시 실록 기록을 크게 개수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왕조 설립의 타당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용비어천가식 기록이 되고 말았습니다.1910년 이후도 실록기록은 약 20년 더 계속되었지만, 1910년 이후의 기록은 거의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 변희룡 2013/09/22 04:50:03
    국사를 연구하는 시스템이 부족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왕조실록, 고려사는 당연히 국역되어 인터넷으로 검색이 되고 있구요. 다른 중요 문집들도 거의 모두 국역되어 (또는 국역되지 않은채)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규장각, 서울대학교 도서관, 민족문화 연구회 등의 사이트에 가면 일부 문중에 내려오는 조상은 문집까지 검색이 됩니다, 아직 더 국역해야할 부분이 무진장 많이 남아 있긴 합니다. 앞의 글의 논조는 전부 정확한 판단으로 보입니다만, 이 두가지가 가려져 있는 듯 하여 보탭니다.
  • 변희룡 2013/09/22 04:56:40
    신성로마 제국이 1200년 지속 되었는지 2000년 지속되었는지는 아직 논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가 신라(999년?)이니, 두 나라의 공통점은 반도국가라는 점에서 찾아집니다. 바다로 보호되고 있는 지형이지요. 미국이 지금, 두개의 대양으로 보호되고 있는 모양이니, 반도국가나 다릅없습니다. 외침으로 부터 대단히 안정한 상태라서, 아마도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 고종무 2013/09/22 10:25:39
    해박하고 좋으신 말씀 감사합니다.
  • 배기준 2013/09/22 12:37:54
    국사가 대학 입학시험 필수 과목으로 지정함은 당연하나 잘못된 편향적 내용으로 된 역사 교과서로 공부한다면 필수가 선택보다 오히려 더 치명적이 될가 두렵습니다. 요컨데 잘못된 교과서를 바로 잡는게 선행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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