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사업 뒷얘기---
변희룡 2014.05.04 조회 1017
공군을 비판한 글이군요. 사실이라면, 정말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내막을 모르니, 그냥 옮깁니다.
중략-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명에 의해 율곡 10년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는 일종의 핵폭탄이었다. 그 핵폭탄 중의 하나가 222사업이라고 명명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이었다. 당시 2억 5천만 달러에 구입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에 대해 나는 단돈 25달러 가치도 없는 폐품이라고 발표했다. 군 전체가 뒤집히듯 요란했다.
이기백 당시 국방장관과 김인기 공군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엄청난 질책을 받았다. 이에 앙심을 먹고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국방차관, 황관영 기획실장 등이 주축이 되어 나를 연구소에서 내보내려고 했다. 불과 3개월 후, 그 10년 선배인 황관영 당시 기획관리실장이 연구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나를 무조건 나가라고 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낸다 해도 중간에 비서관들이 장난질을 칠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 나는 내 발로 연구소를 나갔다. “선배님, 오래 사십시오” 배참으로 던진 이 한마디가 저주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987년 봄, 내가 정처 없이 미국으로 떠난 지 불과 2년이 지나 누가 봐도 건강해 보였던 연구소장은 유명을 달리했다.
율곡 사업은 1974년부터 태동됐다. 1985년과 1986년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율곡 사업의 문제점들에 대해 신경질적일 만큼 관심을 보였다. 1986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74년부터 1986년까지 13년간의 모든 율곡사업 성과를 낱낱이 재평가하라는 명령을 이기백 장관에게 내렸고, 결국 그 어마어마한 과제는 모두가 회피했다. 그러한 명령은 지금까지 오직 전두환 대통령만이 내렸고, 율곡사업을 총체적으로 평가해 본 사람은 아직까지 나와 나의 연구원들밖에 없다.
전두환 대통령이 초미의 관심을 가졌던 사업은 공군의 방공 자동화 사업이었다. 1979년부터 1985년 7월1일까지 공군은 그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방공 자동화 사업’을 추진했다. 그 사업만 완료되면 대한민국 상공을 나는 새 한 마리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잡을 수 있다고 호언했다. 이렇게 구매된 방공 자동화 장비는 1985년 7월1일부터 가동됐다. 중국으로부터 항공기가 세 번씩이나 날아왔다. 민항기가 춘천에 불시착했고, IL-28기가 이리 지역 상공을 40분이나 헤매다가 연료부족으로 추락했다. MIG-21기도 날아왔다. 참새까지도 잡겠다던 방공 자동화 시스템은 어찌된 일인지 이 세 대의 항공기 중에서 단 한 대도 잡지 못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 사업은 당시 국방비의 8퍼센트에 해당하는 2억 5천만 달러, 미증유의 최대 규모 사업이었다. 나는 8개월간의 연구를 통해 그 장비의 소프트웨어 로직을 분석했다. 그 컴퓨터 로직을 가지고 공중 표적을 포착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2억5천만 달러의 사업이 불과 25달러 가치도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 자동화 장비는 없는 편이 백번 낫기 때문이었다. 유지비와 정비비가 엄청나고 인력은 이중으로 늘어났지만 그것을 믿다간 공중전은 백발백중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 자동화사업을 담당했던 오파상을 접촉하여 휴즈사 미국 책임자 3명을 연구원으로 불렀다. 책임자는 대머리가 벗어지고 뚱뚱했다. 그는 내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위엄을 잡았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제공한 시스템에 하자가 있으며, 이는 대통령에까지 보고가 돼서 대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을 꺼냈다.
이에 대해 그는 거만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입니다. 휴즈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휴즈사가 할 수 없는 일은 어느 회사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공군으로부터 수없이 듣던 말이었다. 결국 공군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휴즈사에 코치를 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렇게 기 싸움을 했다. "당신은 통계학에서 Type-I 에러와 Type-II 에러를 아느냐? 에러를 걸러내는 Thresh-hold(문지방:기준)를 몇 %롷 잡았는지 알려 달라" 통계학에서는 잡상(Noise)을 실체로, 실체를 잡상으로 오인하는 에러가 있다. 기준(문지방)을 높이면 실상을 잡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문지방을 낮추면 잡상을 실체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전자를 Type-I 에러라 부르고, 후자를 Type-II 에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친구는 이런 통계학의 기본도 몰랐고 그래서 얼굴이 빨개졌다.
이에 약점을 잡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은 세계 최고가 아니다. 방공자동화는 휴즈사가 설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한 게 아니냐" 이에 책임자는 이렇게 응수했다. "A/S 의무기간 1년이 이미 지났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미해군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나의 동창생들이 매우 많다. 그들은 아시아 각국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나는 지금 즉시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이 Type-I 에러와 Type-II 에러도 모르면서 엉터리 시스템을 한국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
그제야 휴즈사 일행이 확실하게 무릎을 꿇었다. "다시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할 때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물론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굳게 약속한 후 그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후 그들은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우리는 당신을 만난 후 공군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말과는 달리 공군은 방공자동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공군은 시스템의 주인이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앞으로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문의와 요구는 공군을 통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부터 공군을 더욱 멸시했다. 장비는 분명히 잘못돼 있고, 휴즈사는 이를 고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공군은 그들의 면책을 위해 애국을 던지고 해국을 선택한 것이다. 연구소 건물의 내 방은 일요일 도 없이 밤 1시가 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경비원들은 내가 가족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다 했다. 내가 맡은 과제만을 수행했다면 나도 얼마든지 여유 있게 생활을 엔조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들을 찾아 정리하고 이를 장군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몰두했다. 수구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의례 그럴 수 있다 쳤지만, 공군의 이런 자세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합참 작전본부에 설치된 조사팀은 이틀간의 공개토론 끝에 현장으로 나갔다. 토의가 진전될수록 공군은 눈에 뜨이게 내 이론에 밀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사팀에 있던 장군들이 갑자기 눈초리가 달라지면서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토의는 그만하고 현장으로 나가자며 서둘렀다. 처음엔 그렇게 사명감으로 분칠을 하며 철저하게 조사를 하겠다더니! 공군의 로비가 막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 후 수경사령관까지 했고 김영삼 시대에 하나회로 숙청이 됐다.
첫날은 오산 공군작전사령부로 갔고, 다음 날에는 대구 팔공산 레이더 기자로 갔다. 나만 쏙 빼놓고 간 것이다. 내가 오산으로 갔지만 공군 헌병중령이 정문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야말로 막가는 세상이었다.
후에 연구소 동료의 말을 들었더니 결과는 이러했다. 4대의 헬리콥터를 서쪽으로 띄워 놓고 자동화 장비가 이것을 어떻게 잡아내는지를 관찰했다 한다. 자동화 장비의 화면에 무엇이 나타났을까. 실제로 서쪽에 떠 있는 4대의 헬리콥터는 잡히지 않고, 떠 있지도 않은 비행체 84대가 동쪽에 나타난 것으로 보여 졌다 했다. 4대의 진짜 비행기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84대의 허상만 보여주는 기막힌 장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군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주한 미군이 있는 한 전쟁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전투력 약화보다는 책임추궁을 더 무서워해서 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업비들이 많이 지출됐다. 예를 들면 호크라는 방공포는 이동 장비다. 전쟁이 나면 진지를 이동할 수 있도록 작전 개념이 정립돼 있고, 모든 장비가 이동 체제로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300억원에 해당하는 마이크로웨이브 통신 장비가 붙박이식으로 설치됐다. 이동식 유도탄에 붙박이식 통신 장비를 건설하는 것은 코미디였다.
미국의 4C라는 회사가 50억원에 해당하는 장비를 납품했지만 이는 모두가 겉만 흉내 낸 불량품이었다. 공군은 이 회사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해야 했다. 그러나 공군은 이를 숨기는 데 급급했다. 나의 문제 제기에 대해 공군 참모 총장을 선두로 수많은 공군 장교들이 로비와 압력행사에 나섰다. 이 문제가 대통령에 의해 제기되자 처음엔 하나회 국방 차관과 하나회 합참 작전 차장이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호언하며 나섰다.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공중 앞에서 다짐해 줄 때는 그들의 온 몸이 사명감이라는 금물로 화려하게 도금돼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나의 신변을 보호하겠다던 기무사 간부들이 갑자기 나를 보안 위규자라고 위협하면서 시말서를 쓰라 했다. 우군의 약점을 공개했다는 것이다. 장관과 차관은 나를 ‘트러블 메이커’라고 불렀다. 그들은 내가 군에서 나가 주기를 바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군을 나와 도미했다. 내가 떠나자 공군과 합동 참모 본부는 대통령에게 ‘방공 자동화사업 이상 없음’이라 보고했다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미국으로로 1년 동안 도피해 있던, ** 박사가 다시 연구소로 돌아와 들러리를 서주었다고 했다.
1987년 2월 28자로 나는 예편을 했다. 내가 예편원서를 내자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차관의 입이 벌어졌다고 했다. 연구소에 있는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온 장군 급 민간간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니 스미스라는 여성 보스였다. 그녀는 비용분석 기법에 대한 토의에서 내 발표를 들은 후 나를 매우 높이 평가해 주었다. 내가 연구소를 나갔다는 소식을 알고 그녀는 한국에 있는 미군 대령을 나에게 보냈다. “지박사 같은 사람을 한국이 안 쓰면 미국이 쓰고 싶다”며 미국으로 오라 했다.
미국으로 가자 그녀는 즉각 20만 달러의 과제비를 만들어 내가 다니던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으로 내려 보냈고, 해군대학원은 내게 교수직을 부여했다. 과제는 한국과 미국의 방위산업을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제 수행과정 중 나는 펜타곤에서 상당한 시간을 그녀의 사무실에서 보냈다. 한마디로 주위를 휘어잡는 여장부였다. 펜타곤에 있는 동안 미국 고위 관리들의 사고방식에 접할 수 있었고, 수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내 일생의 전화위복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
글쓴이는 지만원 박사입니다. 그의 페북에서 가져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