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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의 전설

변희룡 2014.09.01 조회 612

파로호의 전설-

학생들과 함께, 평화의 댐을 둘러 보고, 파로호의 역사관에 들렀다. 남쪽의 호우 피해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가뭄이 지속되고 있었다. 지금 한참 풍수기인데도, 댐 수위는 저렇게(사진) 낮아진 상태이나, 4대강 사업에 대한 칭찬을 하면 안되기 때문에 가뭄 얘기는 입밖에 낼수도 없는 지경이다.

'춘천국제물 포럼'에 참석한 물관련 내국인 일부는 하나같이 4대강 사업에 대한 성토를 하더라. 그 성토가 내 귀에는 거의 다 틀린 말로 들리더라. 그러나 저리 떠드니, 대항하기 어렵다. 국제 학회지에 가뭄 홍수에 관한 논문을 나만큼 많이 낸 사람은 국내에 몇사람 안되는대도, 내말은 안먹힌다. 그들은 거의 모두 토목 전공자들이고 기상전공자는 나 혼자다. 그래도 할말은 하고 나옸다. ...

파로호 역사관의 77세라는 노 관리인, 반갑게 맞으면서 자기 경험을 알려준다. 12세때 이 지역에서 전쟁을 맞았단다. 그래서 모두 직접 보도 들었단다. 화천 수력발전소를 차지하기 위해 이승만은 특별히 멕아더에게 휴전전에 화천을 꼭 확보해 달라고 부탁한 상황이었다.

당시, 연일 20여대가 넘는 B-29가 새까맣게 몰려와서 백암산에 주둔한 중공군을 두드리더란다. 어느날 멕아더가 리승만에게.. 우린 도저히 저 백암산 중공군을 이기지 못하겠소. 연일 융단폭격을 했는데도, 이튿날이면 포대가 또 새까맣게 올라와 있다. 저 중공군은 도저히 깰 수가 없다고 하더란다...그 포가 고사포였는지, 곡사포, 직사포인지 명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당시 화천지구 민간인들은 캘로부대 (군번없는 용병 부대) 의 지시를 따랐다. 노인과 어린이에게 '돈을 줄태니 적진을 살펴 오라'고 지시 하더란다. 무조건 다녀만 오면 돈을 주었다. 안간다 하면 바로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했다. '전시에는 어쩔수 없는 법이라... ;' 고 노인은 덧붙였다.

다녀오면 주기로 한 돈은 넘쳐나고 있었다,. 캘로 부대원도, 민간인도, 돈받을 사람들이 많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노인이 정보를 가져왔다. 포대를 가장한 것은, 포대가 아니고 검은 페인트를 칠한 나무 토막이었다. 이 나무토막이 무서워 B-29 군단은 매일 고공 폭격만 하고, 지상군은 돌격을 감행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날 한미 연합 공군은 대규모 폭격과 근접지원을 감행했다. 백암산에 희발류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건 노인의 증언이 아니라 다른 경로로 들은 소식). 여기에 맞추러 한미 연합 지상군은 대대적 공세로 들어갔다.

도망가는 중공군은 절반은 화천호에 빠져 죽고 절반은 한미 연합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북으로 가는 도로에는 중공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우리 자동차가 갈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체를 모두 화천호 (지금의 파로호)에 던져 버렸다. 호숫물이 피로 물들었다. 호수 안에는 셀수없이 많은 시체들.

어떤 기록에는 17,000 명의 중공군 사살, 어떤 기록에는 4만명 사살이라고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이 보고 받은 후, 이름을 파로호(오랑케를 깨뜨린 호수)라 칭했다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삼팔선은 태극모양으로 동쪽은 북으로 많이 올라 가고 서울쪽은 남쪽으로 많이 내려온 상태라는 것이다.

노인은 파로호 역사관을 견학오는 어린이 들에게 자기 체험담을 알려 주며 살아 왔단다. 그런데 최근에는 학생들의 단체 관람이 뚝 끊어졌단다. 자기가 안보강연 나가고 싶지만, 학교에서 받아 주지 않는단다. 학교에서 안보현장 견학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교육청 허가를 받은 다음에 얘기하자고 대답한단다. 좌파 교육감들이 하나같이 여기 견학가는 것은 금지하기 땜에, 교사들이 인솔해 오고 싶어도, 교육청 허가 과정에서 금지되더라고 했다.

간혹 방문하는 어린 학생이 , 6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를 물으면 기가 찬단다. 전교조 교사들이 625는 북침이 원인이었다고 하더란다. " 그럼 이 파로호에 전시된 각종 증거물들은 다 거짓말이냐?" 라고 묻는 것으로 노인은 대답을 대신한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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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30
2014.09.01